월간 사람과산 2012년3월호 김규순의 풍수이야기

강한자가 살아 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하다.
수리산과 동래정씨 정난종의 후손


갈치저수지와 수리산 그리고 동래정씨묘역(→).   산봉우리의 중앙용맥을 차지하지 않고 우측 용맥에 자리한 것으로 보아 명분보다는 실리를 추구하는 가풍을 엿볼 수 있다.

글사진|김규순

우리나라는 산이 많아서 산기슭에서 태어나 산의 품에 살고, 산과 대화를 하고 산에 묻히는 일생을 살아왔다. 하나의 가문이 어떤 산과 인연을 맺으면서 명문가로 우뚝 솟아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데, 이를 두고 풍수적 발복을 받았다고 한다. 가문의 흥망에 풍수적 요인이 많은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 조상들은 죽어서도 후손에게 도움을 주고자 노력했다. 명문가의 가옥과 무덤에서 우리의 풍수 메카니즘을 찾아보자. 



수리산 슬기봉에서 내려다본 중출맥이 갈치산으로 진행하고 있다. 우측중간 희색이 갈치저수지이다. 능선을 따라 MTB자전거가 다녀서 길이 나 있고, 그 아래쪽으로 임도가 만들어져 있다. 수리산의 봉우리와는 달리 중출 용맥은 후덕하고 유려하게 발달하여 살아 있는 용과 같이 나아간다. 이 용맥의 마지막 봉우리 좌측으로 동래정씨묘역이 있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사람이 살기 좋은 땅을 고르는데 지리(地理), 생리(生利), 인심(人心), 산수(山水)를 살펴야 한다고 했다. 군포의 속달동이 택리지에서 말하는 살기 좋은 땅이다. 사람이 알아도 실천하기는 어려운데 정난종은 현명하게도 그대로 따랐던 사람이다.

동래부원군 정난종

동래정씨는 그 유래가 깊을 뿐만 아니라 왕조가 바뀌어도 변함없이 나라의 중심에서 기둥역할을 한 가문이며, 숱한 정변과 사화 속에서도 명맥을 유지한 뿌리 깊은 명문거족이다. 


정난종의 묘. 바로 뒤로 정광보(장남)의 묘와 두번째 보호각 위의 정광필 묘가 보인다.

동래정씨가 조선왕조에서 명문가로써 자리를 잡게 된 것은 정난종(14세손, 1433-1489)이가 전환점이다. 정사의 아들 5형제 중 3남인 정난종의 후손에서만 정승 13명과 대제학이 2명 배출되었다. 정난종은 이시애의 난(1467년)을 평정하고, 이조판서를 지내면서 동래정씨 가문의 중흥조(中興祖)로써 조선의 문벌귀족으로 성장하는 정치적 토대를 만든다.

가문은 하나의 나무이다. 정난종이가 가문의 튼튼한 뿌리가 되고 그의 아들 정광필(차남)이 흔들리지 않는 줄기가 되어 버팀목이 되었고 증손 정유길(17세)과 고손 정창연, 정지연(18세)이 꽃이 되었으며 주손인 정태화, 정치화, 정지화(19세), 그리고 정재숭(20세), 정석오(22세), 정홍순(23세), 정존겸(24세), 정원용(25세), 정범조(27세)가 정승이 되어 열매가 풍성했다. 연산군부터 고종까지 동래정씨가 배출한 정승과 일하지 않은 왕이 없을 정도이다.


명문가에서는 역장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비루한 가문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 역장이다. 할아버지에서 증손자까지 말그대로 역장의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

역장이 만들어 낸 조선 제일의 명문가

동래군파의 묘역은 수리산 슬기봉의 강한 기운이 수차례의 기복을 통하여 순화되어 후덕하게 변한 중출맥의 끝자락으로 수리산의 정기가 뭉친 곳이다.

정난종의 부인 완산이씨가 죽자 장남 광보는 부자가 태어난 예천 용궁으로 가지 않고 성종으로부터 하사받은 사패지지(군포 속달동)에 모친을 모신다. 4년 후 정난종도 부인 곁에 묻혀 새로운 가문이 열린다. 그 후 정광보 정광필 형제가 묻히고, 손자와 증손이 차례로 그 위에 무덤을 만드니 이를 도장혈(刀藏穴)이라 한다. 도장혈이란 하나의 용맥에 여러 개의 자리가 있는데 역장 형식으로 만들어야 후손들이 번창한다는 속설이 있다.

역장(逆葬)이란 조상이 산의 아래쪽에 묻히고 후손들이 조상의 위쪽에 무덤을 만드는 것을 말하는데, 영호남지방에서는 역적이 나온다고 극렬 반대하는 형식이다. 그러나 그들은 위아래가 판단의 기준이 아니라 좋은 자리의 여부가 판단의 기준이다. 조상이 좋은 자리를 먼저 차지하고 후손들은 그 다음 좋은 자리를 차례대로 들어가는 것이다. 좋은 자리가 위에만 있다는 법은 없다. 같은 모양이라도 해석이 다르다. 이것이 발상의 전환이다. 좋은 자리에 모신 조상이 후손을 돌보는 것이므로 조상을 먼저 좋은 자리에 모시는 것이 당연한 순리이다. 그래서 명문가에서는 역장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명문가에서 터부시 하는 것은 역장이 아니라 경직된 사고방식이다.

동래군파 종택의 기증

군포 속달동의 종래군파 종택을 보면 산기슭의 협소한 자리에 앉아 있는데, 편안한 자리이기 보다는 긴장감이 도는 자리이다. 가옥은 내공을 쌓을 수 있는 평탄하게 머무르는 자리를 택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음택은 산을 먼저 보고, 양택은 물을 먼저보아야 한다. 뛰어난사람은 때를 만나면 엄청난 힘으로 폭발하듯이 자기의 역량을 펼쳐 기회를 잡아야 한다. 이곳은 내공을 키우는 자리이기 보다는 가문의 명예를 지키는 자리이다.


정광필의 묘에서 내려다 본 광경.  건너 마을에 동래정씨 동래군파 종택이 있다.

동래군파 종택을 지킨 광보의 후손보다 동생인 광필의 후손에서 12명의 정승이 태어난다. 동래정씨 최초의 영의정은 정광필(1462-1538)이다. 그는 부친의 시묘살이를 마치고 성종 20년(1492)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른다. 정광필은 회현동에 저택을 마련했다. 우리은행 본점이 들어서고 저택은 없어졌지만 500년 된 은행나무가 12명의 정승이 태어난 동래정씨가문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서울은 예나 지금이나 벼슬 명당은 서울에 집중되어 있어서 벼슬을 하려면 서울에서 자리를 잘 잡아야 한다. 그리고 반드시 고향이 있어야 한다. 고향은 이중환이 주장한 산수(山水)이다. 자손 번창은 조상의 묘지의 영향을 받지만, 자손의 벼슬은 주택의 영향도 많이 받는다. 좋은 자리에 모신 조상은 배의 엔진 역할을 하고 후손이 사는 가옥은 방향키의 역할을 한다.

속달동(速達洞)은 수리산이 품고 있어서 개발을 한다면 금싸라기 땅이 될 것이다. 소위 종가나 명문가의 아킬레스건은 재산이다. 이를 두고 아귀다툼을 하다가 갈등과 반목이 심해져서 문중이 흩어지고 찢어져서 비루한 가문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백수(百壽)를 맞이한 종손 정운석(1913년생)옹은 아홉 명의 자식들과 상의하여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종택과 땅(18,176㎡)을 2011년 5월 문화유산국민신탁에 무상증여 했다. 500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조상의 재산이 아홉 명의 자손에게 유산상속하게 되면 재산이 뿔뿔이 흩어질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니, 조상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소유를 버리고 조상의 문화유산을 길이 보존할 수 있는 길을 선택하였다. 실로 명문가의 후손다운 결정이 아닐 수 없다.

수리산 정상에 봉수대가 있어서 호남지방의 일을 한양으로 전달하는 길목이었으므로 군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호남에서 한양으로 올라올 경우에도 수원군 남양면(지금의 화성-남양호)까지 배를 타고 와서 육로로 과천현을 통과하여 한양으로 들어가는데 동래정씨가 둥지를 튼 속달동은 과천현 소속으로 교통의 요충지였다. 임진왜란 당시 전투가 있었고, 한국동란 때에도 미군이 중공군과 치열한 포격전을 벌인 곳이지만 동네사람 중 한 사람도 다치지 않아서 조상이 후손을 돌본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종택으로써는 크지 않아서 소박하다. 명문가이지만 검소함을 실천하는 의미에서 작게 지었다고 한다. 사랑채 건너편 마당 앞에 작은 못이 하나 있는데 6.25때 포탄이 떨어져 불이 났을 때 소방수 역할을 했다.

현대의 가옥 구조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지만 종택에서는 가장 중요한 공간으로 조상의 위폐를 모시는 사당이다. 아파트에 거주하는 종가일 경우 사당이 없는 경우가 많은데 아직도 종손들은 사당이 없는 종가댁에 대해서는 말들이 많다.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다.

동래정씨 혈족에서 불사이충의 정몽주나 왕조를 개국한 정도전과 같은 인물은 없다. 퇴계, 율곡과 같은 동방 18현도 없고, 왕후도 배출하지 않았으며, 사육신과 같은 충신도 없어서 때로는 처세의 가문으로 오해 받기도 하지만, 시대정신에 따라 사는 것일 뿐 누가 옳고 누가 그른 것은 아니다. 왕을 위해 죽는 것이 충신이라지만, 가문이 폐절한다면 의미가 없는 것이다. 백성을 구하고 백성을 위하는 것이 진정한 지도자가 아닌가. ‘세상은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라는 교훈을 느끼게 해주는 명문가의 가르침이다.

대한민국의 동래정씨 인물을 살펴보자면 정인보(한학자, 건국훈장), 정석모(내무부장관, 국회의원), 정양모(국립중앙박물관장), 정창영(연세대 총장), 정경식(대법관), 정상명(검찰총장), 정동영, 정진섭, 정수성 (현직 국회의원)을 들 수 있다. 대한민국 5천만 인구 중에 동래정씨는 50만 명을 상회한다. 인구비중 1%에 국회의원 수 1%를 달성하여 제 역할을 하고 있는 듯 하나 조상의 위세에 비하면 아직도 미약하다. 동래정씨가문이 가진 잠재적 에너지가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고 있음이 안타깝다.

여기에서 동래정씨가 중흥을 이룩한 주산인 수리산(修理山,489m)을 쳐다보자. 수리산은 높지 않은 산이지만 주봉은 험악하며 거의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고 바위도 날카로워 살기를 띠고 있어서 대단한 성정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수리산에서 흘러나온 산줄기는 마을의 뒷동산을 이루며 후덕하고 부드러워 사람이 기대고 살기에 안성맞춤이다. 지금도 폭2m 정도의 임도에는 많은 시민들이 산책을 즐긴다. 이 산의 영향을 받아 동래정씨 후손들은 내유외강형이 많을 것이고 성격도 대단할 것으로 생각된다. 대종회에서 성씨를 초월한 멘토를 모시고 수리산 산악회를 조직하여 수리산의 정기가 되살린다면 문중의 에너지를 집약하는 계기가 될 것이며, 이로써 대한민국의 미래를 이끌어갈 동량들을 더 많이 배출하여 명문가의 명예를 드높이기를 기대한다.

[참고 말씀주신 분 : 정준수, 정규만]

김규순

서울풍수아카데미원장 www.locationar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