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학문 따라가기에 급급한 학계에 불만, 캠퍼스 밖에서 학문

지난 2월 26일 서울삼성병원 영안실. 도올 김용옥씨의 제자이며 동양철학자인 이동철(49) 용인대 교수가 조선일보 이규태 고문의 상가를 찾았다. 이 교수는 생전에 한번도 이 고문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왜?

이 교수는 “왠지 선생님 마지막 가시는 길에 인사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라고 했다. 이어 그는 “그분은 강단 밖 한국학의 거목이었다. 같은 한국학 분야의 종사자로서 조문을 하는 것은 후학된 도리”라고 덧붙였다.

‘이규태 한국학’의 개척자 이규태 고문의 타계를 계기로 ‘강단 밖의 한국학’ ‘강호(江湖) 한국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최근에야 일부 젊은 강단 한국학자를 중심으로 ‘강호학’을 학문적으로 다루려는 시도를 하고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것은 사실 정통학계의 금기(taboo)사항이었다. 동양철학도가 주역이나 풍수에 관심을 기울이는 순간 이단(異端)으로 몰려 파문을 각오해야 했다.

강호 한국학은 주로 문사철(文史哲), 즉 인문학을 중심으로 형성돼 왔다. 철학과 역사 분야에서 특히 활발했던 반면, 창작의 자유가 비교적 보장되었던 문학분야에서는 강단과 강호의 구분이 그리 엄격하지 않았다. 소설가 시인 등 창작자들이 대부분 강단 밖에 있었고 강단은 문학비평을 중심으로 이뤄지면서 자연스럽게 역할분담이 된 때문이기도 하다.

강단학과 강호학이 서로 상종하기 힘들 만큼 거리가 멀어진 데는 식민지 36년이 크게 작용했다. 전통적인 학문의 비판적 계승이라는 학문적 근대화의 체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송두리째 빼앗겨 버렸기 때문이다. 이는 광복 이후 강단 동양철학계의 상황을 살펴보면 쉽게 드러난다.

‘동양철학’이란 이름을 단 학과가 우리나라에서 처음 생겨난 것은 1947년 성균관대에서였다. 당시에는 유학과로 할 것인지 동양철학과로 할 것인지 논란이 있었다고 한다. 전 성균관대 유정동 교수는 당시 상황에 대해 “이름은 동양철학과로 정해졌지만 공맹(孔孟)철학을 중심으로 하고 불교철학, 인도철학, 노장철학을 안배하는 식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그나마 ‘한국철학’에 대한 인식은 결여돼 있었다. 성균관대에 한국철학과가 설립된 것은 34년 후인 1981년이다.

서울대의 경우 사정은 더 심각했다. 유학을 전공한 민태식 교수가 1946년부터 3년간 혼자서 동양철학을 가르치다가 강단을 떠난 후 1972년이 돼서야 겨우 이 분야의 교수가 충원되었다.

학계의 사정은 변화하는 사회현실을 따라잡지 못했다. 4·19혁명, 그리고 특히 1960년대 들어 경제성장이 이뤄지면서 어느 정도 자신감을 회복하기 시작한 한국인은 ‘한국적인 것’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박정희 정권의 민족주체성 고양과 맞물려 있긴 하지만 사실 ‘한국적인 것’에 대한 물음은 자발적 측면도 강했다. 특히 청년층에게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은 곧 실존적 물음이기도 했다. 서구학문을 따라가기에 급급했던 강단학계는 답을 주지 못했고 이에 불만을 가진 청년들은 하나 둘 캠퍼스 밖에서 나름의 해답을 찾기 시작했다.

이런 맥락에서 김범부(1897~1966)는 우뚝 선 존재다. 일본 유학생 출신으로 불교철학에 조예가 깊어 전국 사찰의 고승들을 찾아다니며 불교의 진리를 깨우치기 위해 힘썼고 불교 중앙학림에서 후학을 양성하기도 했다. 그의 영향은 철학계보다는 문학 쪽으로 이어졌다. 김동리가 바로 그의 동생이었고 서정주가 그의 제자였다. 김동리와 서정주의 문학세계에 공통된 불교적
세계관과 한국적인 것에 대한 모색은 그에게서 흘러나온 것이다. ‘분신공양(焚身供養)’을 모티브로 한 김동리의 걸작 ‘등신불’이 김범부와 한용운의 대화를 들으면서 구상한 것이라는 얘기는 이미 유명한 일화다.

1960년대 방황하던 청년들에게 김동리와 서정주가 주옥 같은 문학작품을 통해 한국혼을 불어넣었다면 이어령은 에세이를 통해 일대선풍을 일으켰는데, 1960년대 초 강단 밖에 있던 그가 쓴 ‘흙 속에 저 바람 속에’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 말로 철학하기’ 운동을 펼치고 있는 이기상 교수(한국외대 철학)는 “독일 철학을 전공한 내가 늘 한국적인 것, 한국인에 대한 사색을 멈추지 않고 마침내 ‘우리 말로 철학하기’ 단계에까지 이른 것은 청년시절 읽은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때문이 아닐까 한다”고 밝혔다. 그 후 이어령은 이규태의 ‘사실의 한국학’에 대비되는 ‘해석의 한국학’을 구축하게 된다.

역사와 철학 쪽의 사정은 더 복잡하다. 서로 엉켜서 돌아가기 때문이다. 강호의 도인들에게 역사와 철학은 하나다. 흔히 일부 김항과 함께 조선 최후의 역학자로 불리는 야산 이달이 대표적인 경우다. 일부 김항이 정역(正易)을 세웠다면 야산 이달(1889~1958)은 홍역(洪易)의 창시자로 불린다. 홍역이란 음양오행과 주역을 결합한 역학이다.

‘이주역(李周易)’으로 불렸던 이달의 학문은 우선 가학(家學)으로 이어지고 있다. 셋째 아들 이간화가 홍역을 이었고 다시 이간화의 두 아들 응국·응문은 현재 홍역을 대중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달의 제자로는 김석진, 김병호 등이 있는데 대산 김석진(78) 선생은 얼마 전 스승의 학문을 바탕으로 주역을 쉽게 풀어쓴 대작 ‘대산 주역강의’(한길사 전3권)를 펴내기도 했다. 이달의 넷째 아들은 재야사학자로 유명한
이이화씨다.

서울 신당동 자택에서 주역을 강의하는 남동원(82) 선생은 독학으로 주역을 깨우친 경우다. 여기서는 이형성 전북대 전라문화연구소 연구원, 이천승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 연구원 등 강단학계의 박사학위 소지자를 비롯해 소설가 김종록씨, 나남출판사 조상호 대표 등이 주 1회씩 늦깎이 주역공부에 열심이다. 남동원의 역학은 마음수양을 강조한다.

‘원주의 예수’로 불렸던 무위당 장일순(1928~1994)은 강호의 대표적 사상가였다. 시인 김지하의 정신적 스승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특히 그의 생명사상은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때 사회운동에도 뛰어들었던 장일순은 노자사상과 생명의 소중함을 바탕으로 ‘한살림’운동을 제창해 큰 호응을 얻었다. 각계의 젊은이들이 그의 제자가 되기 위해 원주를 찾았다. 정종진 교수(청주대 국문학)는 “강단의 인문학자들은 지행합일을 실천한 장일순 선생 같은 강호파 인문학자에게서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전통사상의 현대화라는 맥락에서 장일순 못지않은 사상가는 다석 유영모(1890~1981)다. 유불선(儒佛仙)이라는 우리의 전통적인 3대 사상을 바탕으로 기독교를 재해석함으로써 새로운 정신세계를 개척했다는 평을 듣는다. 오산학교에서 이승훈을 스승으로 모셨고 함석헌을 가르쳤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인 최남선, 정인보, 이광수 등과도 정신적 교류를 가졌다. 최근 강단학계에서도 동서양 사상을 하나로 통합하려 했던 사상가로서 유영모를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자신의 문제의식을 수용해주지 못하는 강단학계에 갑갑증을 느껴 교수직을 던져버리고 강호에 뛰어드는 인물도 많다. 도올 김용옥이 대표적인 경우이며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직을 던지고 풍수연구에 전념하고 있는 최창조씨도 그런
경우다. 연금술에서 화학으로 진화한 서구학문의 전통을 따르기에 우리 학계가 척박했던 탓이다. 그 후 최창조씨는 자생풍수를 연구하고 학문적으로 정립하는 데 혼신의 힘을 쏟고 있다.

1987년 건축사 분야이긴 하지만 박시익 박사가 고려대에서 풍수와 건축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아 강단학계의 첫 번째 공인을 얻어냈다. 1991년에는 이몽일씨가 경북대에서 한국의 풍수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강호의 풍운아처럼 떠돌던 풍수학은 조금씩 강단학계로 파고 들고 있는 셈이다. 최근에는 독일에서 독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풍수에 눈을 뜬 김두규 박사가 방대한 규모의 ‘풍수학 사전’을 펴내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 강단과 강호의 거리는 멀다. 강단학계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독자적인 학문의 길을 걷고 있는 역사학자 이덕일씨는 강단·강호로 나뉘는 학계풍토에 대해 이렇게 비평했다. “강단학자들은 자신이 물려받거나 만들어낸 문제의식에서 한걸음도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세상에 문제는 너무나 많다. 학생은 교수에게 불만을 갖게 되고 자연스레 강호학자들의 설득력 있는 주장에 이끌리게 된다.”

강호학은 대부분 ‘한국적인 것’에 대한 탐색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맹목적인 서구 지향의 강단학계에 대해 비판적일 수밖에 없다. 한국의 철학이나 역사까지도 서구의 방법론으로 접근하려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강호학이 활성화되는 공간이 열린다. 사람은 삶의 의미를 알고 싶어하고 학문은 이 같은 의미문제에 침묵한다. 학문과 일상의 분리다. 학문이 일상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한 강단학과 강호학의 대립은 한동안 계속될 전망이다.

[주간조선 2006-03-15 09: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