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순의 풍수이야기]  월간 사람과산 2012년 9월호

기린산과 한산이씨의 기개, 그리고 월남 이상재

폭염으로 지루하다가 입추가 지나자 날을 잡아 서천에 가는데 도중에 비가 오기 시작하더니 답사 내내 비가 내렸다. 농부들에게는 반가운 비가 아닐 수 없고 나에게도 시원한 동반자가 되어주어 다행이었다. 우의와 우산을 준비하지 않았더라면 봉변(?)을 당할 뻔했다. 서천역에 내려 한산행 버스를 타면 1,100원의 착한 금액에 농촌 들녘을 만끽하며 드라이브를 즐길 수 있었다.

한산이씨의 시조(이윤경)가 묻혀있는 산은 건지산(乾至山, 127m)이지만, 한산이씨를 명문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산은 기린산(麒麟山, 146m)이다. 나지막한 산으로 산악인에게는 언덕에 불과하겠지만, 금강하구의 평야에서는 우뚝한 모양으로 그 기운은 어느 산에도 뒤지지 않는 자태를 보여주고 있었다.

구름에 싸인 기린봉(麒麟峰. 146m. 서천군 기산면 영모리) 아래에 목은 이 색선생과 셋째 아들의 묘가 보인다. 장남과 차남은 정치적으로 희생되었고, 셋째 아들(종선)이 부친의 수발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글 사진 | 김규순 (서울풍수아카데미 원장, www.locatioart.co.kr)

풍수학에서 복은 귀(貴),부(富),손(孫) 세 가지로 나누어 살핀다. 귀는 명예와 벼슬을 의미하고, 부는 재물이 가득한 부자를 뜻하며, 손은 자손이 번성함을 말한다. 풍수에서 산은 인정(人丁)을 주로 관할한다. 인정이란 가문의 인물이다. 명문가의 인물을 알아보려면 명문가의 산을 살펴보아야 그 성정을 알 수 있다. 산이 기이하고 물이 아름다운 곳이 한산인데 그 중 가장 빼어난 산이 기린산이다.

공자는 ‘기린’은 상서로운 동물로써 성인이 태어날 조짐으로 나타나는 동물이라고 했다. 공자가 태어나기 전에도 기린이 출몰했다고 한다. 전국시대 노나라 애공 때에 숙손씨가 기린을 사냥하자 불상사가 일어날 조짐이라고 애처로워했다는 기록이 <춘추좌전>에 보인다. 그러므로 기린봉, 기린산이라 명명한 지명에는 현인이 태어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기린을 상서로운 동물이라 하지만, 강인한 동물이 아니어서인지 공자처럼 수난의 연속이다. 

목은선생의 묘에서 문헌서원 건너편에 소나무 사이로 조부(이자성)묘와 목은의 부인(안동권씨)의 묘를 바라보고 있다.

한산의 기린산은 목은 선생의 조부이신 이자성(? -1310)의 묘가 있는 곳이다. 한산이씨의 시조(始祖)께서 가문을 열었으나 200여 년 동안 큰 인물이 나타나지 않다가 이자성이 기린산에 묻히면서 아들 이곡(1298-1351)과 손자 이색(1328-1396)이 원나라 과거에 급제하였다. 이곡은 1333년에 향시에 수석 합격했다. 이색은 1353년에 향시에 장원 급제하고 1354년에 회시에 장원을 전시에 차석급제를 하여 원나라에서 국사원편수관에 임명되었다. 신라시대 고운 최치원선생이 당나라의 과거에 합격한 이후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고려 왕조에서 부자가 나란히 대제학을 역임하기도 한다. 목은 선생은 친구인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의 회유를 거절하고 유배를 다니던 중, 아들 이종덕과 이종학은 정적에게 살해당하였으며, 자신도 여주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다.

목은 이색은 고려말기의 성리학자이지만, 조선 성리학의 뿌리였기에 그를 추종하는 무리들이 많아서 조선창업의 신진세력들이 목은을 홀대하기 어려웠다. 조선의 성리학은 회헌 안향으로부터 학맥이 시작되는데, 익제 이제현-목은 이색-포은 정몽주-야은 길재-점필재 김종직-한훤당 김굉필-정암 조광조로 이어진다. 이후 정암 조광조의 학맥은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 그리고 퇴계 이황으로 갈라진다. 

정자가 서 있는 좌측 산이 건지산, 중앙이 절안산, 우측 철탑 뒤에 보이는 산이 기린산이다. 월남 생가에서 본 광경이다. 높고 장대한 산만이 기개를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명산에 명당이 없다’라는 말과 같이, ‘마을 뒷동산에 명당이 있다’는 옛말이 있다. 이런 산이야말로 사람을 키우는 산이다.


한산이씨의 후손을 보면 어려운 시대를 지조로 살다간 인물이 많다. 목은의 현손 사육신 이개(1417-1456)의 기개가 남다르다. 그는 역사적으로 충신으로 추앙받지만, 시대적으로는 왕(세조)를 부인하였으므로 그 후손들이 정치적 주류에서 밀려나는 계기가 되었다. 다만 이개의 삼촌인 이계전은 세조를 도와 계유정난의 1등 공신이 되어 가문을 멸문지화에서 구해냈으며 그 후손들의 묘지가 성남시 분당중앙공원에 있다.

토정 이지함(1517-1578)은 목은 선생의 6대손이다. 계유정난의 1등공신 이계전(목은의 손자)의 고손자이므로 정치적인 토대가 마련되어 있었으나 주류로 나설 수 없는 운명을 지니게 된다. 토정의 아버지(이치)는 연산군 시절 폐비윤씨 사건으로 진도로 유배당하고, 토정 외가의 선대는 이성계의 혁명을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세조를 멀리하고 세종에 대한 절의를 지킨 집안이었으며, 장인(이정랑-정종의 증손)도 1549년 이홍윤 역모사건으로 왕으로 추대된 연유로 능지처참으로 역사에서 지워진다.

토정은 서삼촌인 관상감정(觀象監正) 이번신과 격암 남사고 외에도 서경덕, 위한조, 송익필, 서기, 서치무, 김순종 등 산중처사와 교류하면서 천문지리를 통달하였다. 그는 선친이 좋지 않은 자리에 묻혀 있음을 고심하다가 보령해안가 고만산으로 이장한다. 그 뒤로 영의정(이산해), 좌참찬(이산보), 형조판서(이결전)가 배출되어 가문의 중흥을 이룬다. 토정 자신은 기인으로 생활하였지만, 풍수를 통하여 후손들을 조선의 주류로 편입시키려는 노력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기린봉의 정기를 받아 일 기린봉에서 동쪽으로 뻗어 내린 용맥을 따라가면 한산면 종지리에 민족운동가인 월남 이상재(1850-1927, 목은의 17세손)의 생가가 있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해외나 만주가 아닌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펼친 남아였다. 월남선생은 조선 말기에 신사유람단의 수행원으로 일본을, 2등서기관으로 미국을 방문하면서 국제적 시야를 넓힌 인물로써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순국한 손꼽는 민족 운동가이다. 월남은 목은의 첫째 아들(이종덕)의 후손이다. 그는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학무국장으로 재직할 때 신교육제도를 창안하였다. 그 후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만민공동회 의장을 수행하였다. 1910년 국권을 강탈한 일제에 항거하여 YMCA기독청년회를 사수하였다. 1922년 조선교육협회를 창설하고 회장이 되셨으며, 1924년 조선일보 사장을 역임하면서 민족운동을 이끌었다. 1927년에는 민족단일전선인 신간회를 결성하고 창립회장으로 추대되었지만 월남선생은 광복을 보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갔다.

월남선생의 생가. 2010년에 복원. 생가 뒤에 보이는 조그만 봉우리는 기린봉과 이어져 있다. 생가 앞은 너른 평야이며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월남이상재 선생 흉상

기린산 바로 아래에 이어져 있는 건지산은 한산이씨가 최초로 선택한 산이다. 이곳에 한산이씨의 시조인 이윤경의 묘가 있다. 해동지도에는 乾止山, 신동국여지승람에는 乾至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乾止山은 하늘이 머무는 산, 乾至山은 하늘에 이르는 산, 하늘과 통하는 산이라는 뜻이다. 한산이씨는 하늘이 점지한 가문이므로 건지산을 선택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한산이씨의 시조인 이윤경의 후손이 한산현 동헌의 마루아래가 명당임을 알아차리고 조상의 유골을 그곳에 묻었으며, 그로인하여 발복을 받아 가정 이곡과 목은 이색이 태어났다는 익히 알려진 풍수문화유산이다.